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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지식인들에 대하여

글쓰기/medieval times

by 엘뤼알 2020. 2. 1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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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에게는 의무가 있다고들 한다. 두 가지의 의무.

하나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드레이퓌스 사건에서 보여준 에밀 졸라가 그 전형이라 하겠다.

 필시 시대를 가리지 않고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자질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어떨까.

분명 지식은 차고 넘치는 사람들이 그 수 또한 차고 넘치겠으나,

그 지식과 함께 쌓았어야 할 통찰을 갖췄다고 할 만한 이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건 아마도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버린 이 나라의 역사에도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서구의 체제 변화는 혁명에서 기인했다.

근대사회로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확립된 절대왕정이 혁명을 통해 무너졌다. 

신대륙의 발견으로 시작된 상업, 산업혁명은 부르주아를 낳고,

도시화를 진행시켜 노동자들을 출현시켰다.

그로 인해 계층이 분리되며 도시의 빈민 등 새로운 문제들이 쌓여갔고,

결국 혁명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식인들은 구체제의 문제점을 그대로 지켜보고 혁명을 통해

세상을 말 그대로 뒤집어버리는 경험까지 하게 된다.

그 뒤 유럽은 차츰 안정을 찾아가다가 다시 러시아 혁명까지 겪었다.

 

이렇게 기존 질서가 모두 무너졌다 다시 서게되는 과정을 겪으며

새로운 계급사회가 성립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성립 과정에서 계층들은 뒤섞였다.

민중의 의지로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사상을 스스로 만들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허나 우리나라는 혁명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

스스로 깨우쳐보려는 작은 시도마저 좌절된 채로 나라를 빼앗기고,

기존의 질서는 그 우두머리들만 몇몇 더 늘었을 뿐 바뀐 게 없었다.

전해 내려 오는 질서에 사람들은 순응했고,

거의 모든 생활이 땅에 매여있었던 점도 변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고, 이 땅의 지식인이라는 자들은

혁명을 꿈꾸며 그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없이 사는 이들이 보기에는 꿈같은 세상이었다.

너무 좋아서 꿈이고, 실현될 수 없어서 꿈이었다.

 

이 나라에는 그 중간과정, 혁명이 빠져있었다.

사상이 받아들여질 맥락이 없었다.

민중은 혁명을 일으켜본 적이 없고,

지배층은 단 한 번도 계층 자체가 흔들린 적도 없었다.

이 토양이 없는 상황에서 서구의 사상을 그대로 들여와

아무리 정의로운 세상이라 외쳐봐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리고 신사상을 들여온 지식인들은 이 나라의 인민들의 땅에 대한 욕망을 간과하였다.

부쳐먹을 논밭마지기가 소원인 이들에게 계급의식은 생겨나지 않았다.

도시의 근로자들은 어떠했을까. 실제로 강점기 시절

각종 노동연맹이 불타오르듯 생겨나고 노동자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공산주의는 민중에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지식인 자체의 태생적 한계가 있다.

지식인인 된다는 건 치열한 고민과 탐색의 과정을 거쳐왔음을 말한다.

그 과정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의 전반적인 생활수준이 향상되어 대부분의 국민에게 의식주 문제가 없지 않은 이상 지식인들은 특권계층의 자제들로부터 출현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게 된다.

 그 사회의 모순에 대해, 불합리에 대해 알게되고, 이건 아니라고 말하려면 자신의 출신 계급을 배신해야 한다. 어쩌다 한 번씩, 무산 계층에서도 우연인지 필연인지 비상한 두뇌를 지니고 태어나 온 일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라난 지식인도 있다. 이들은 더 큰 일족의 기대를 배신해야 한다.

 

이 족쇄를 깨버리고 혁명의 길에 들어서려면, 족쇄따윈 아랑곳 않는 자신의 커다란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을 키워내지 못한 이 땅에서는 그 의지는 쉽게 쓰러져갔다.

 

이렇듯 환경부터 태생까지 고정되어있는 이 나라에서

지식인이라는 인간들 중 그 역할을 제대로 하려는 이는 손에 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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