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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1편)

글쓰기/SF 와 Fantasy (단편)

by 엘뤼알 2020. 2. 1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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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이었다. 그녀석의 전화가 왔던 것은.

오랜만에 통화를 해서 그런건지 문득 목소리가 좀 이상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하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지라 그런거라 생각했고 갑자기 왜 나에게 연락을 한 건지는 좀 궁금했다.

나와 그녀석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가 아마도 대학 졸업하고 5년 정도 지난 후 였던가. 회사 업무 때문이었는데…


 녀석은 그야말로 엄청난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가업을 이어받을 필요도 없으니 집안에서 녀석이 무얼 하든 분란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돈이야 넘쳐나니 그야말로 하고 싶은 일은 말그대로 뭐든 할 수 있는?

 그런 인간하고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때 그 순간이 후회되기는 했다.


그래. 난 그때 이렇게 잘나가는 인간하고 친해지면, 솔직히 좀 붙어지낸다면 떨어지는 게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놈 집안 회사에라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만약 들어간다면 오너 아들의 친구이니 꽤 잘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땐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거의 다 왔다고 느껴지기까지 했었다. 그녀석이 몰고다니는 아니, 지금 생각하면 그녀석의 묵인하에 일방적으로 따라다니기만 했던 무리 중 한명으로 낄 수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한동안 잘 다녔는데 어느날 그녀석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석만 믿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기대만 가지고 살던 나는 한순간 넋놓은 바보가 되고 말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을 떠돌기만 하다가 그나마 운이 좋게 공대를 선택했기 때문인지 지금 이 회사에 들어와서 밥은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이 정도로 사는 것만 해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 후 회사에 다닌 지 2~3년 정도 지나서 였을까. 우연히 회사 프로젝트 진행 중에 그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아마 하청에 재하청 정도 였을듯 한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벌 기업이 아닌 재벌가 3세의 개인 프로젝트에 설비 부품 납품 계약을 맡았던 거였지.

그러던 중 납품했던 부품에 문제가 생겨 AS가 필요했었고, 사이트가 그녀석의 집이란 걸 알고 난 혹시나 하는 기대에 부풀어 출장근무 지원을 했었다.

며칠 뒤엔 그녀석의 그 어마어마한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가본 건 처음이었기에 난 그녀석을 찾기위해 한참을 헤맸고 결국 만나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녀석을 별로 반가워하는 기색도 없이 책상위에 명함하나 놓고 가라는 말 뿐이었고,

난 그대로 따른 후 조용히 뒤돌아서서 나오는 걸로 만남은 마무리 되었다.

 그 후로 얼마간 헛된 망상을 또다시 품었던 나 스스로를 책망하다가 이내 그런 생각 따위는 다 잊어버리게 되었고 다시 지금과 같은 별 볼일 없는 오늘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잘 살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먼저, 전화를 하다니. 그때부터 이건 이상하다는걸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사람의 욕심이라는 건 이미 다 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저 밑바닥에서 마음의 주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그 마음을 모두 채워버리는 것인지.

 저녁에 술 한잔 하자는 말에 그냥 옛날 친구 한번 만난다는  마음만 가지고 가는 거라고 착각한 채 그녀석을 만나러 나섰던 것이다.


 그녀석이 먼저 만나자고 했던 건 대학 시절에도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난 당연하다는 듯 기대감에 차 있었다.

이번에 나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는 건 분명 나에게 바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게 아니겠는가.

그래 나에게 맡길 일이 있었던 건 맞았다.

다시 되돌려 생각해 본 후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석이 했던 모든 행동은 일종의 실험같은 것이었다.

옛날 무리지어 돌아다니던 시절에도 그녀석은 주로 지켜보기만 했고, 가끔 이러저러한 권유를 빙자한 지시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웬걸 이런 모습은 예전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텐데, 정말 놀랐다.  옛날의 그 떠중이 무리 중 누구에게라도 떠벌리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냈을 정도였으니까.

이렇게나 겸손한 녀석이라니 분명 이 5년 새에 큰 일이 생겼던게 틀림없다 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은 맞았다.

그리고 그건 최근이었다.


저녁에 회사를 나와서 그녀석을 만나러 갈 때의 느낌은 좋았었다.

예전에 가졌던 나의 거지근성이 다시 살아나는 기분이었는데, 괜찮았다. 아니, 만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 당시에 느꼈던 우쭐함도 이젠 다 잊은 채로 살고있다 생각했었는데,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사실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마주한 현실에 맞추어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멀리서 바라본 그녀석의 모습은 바뀐게 없었다.

멍하니 서있는 듯 했는데 내가 먼저 아는 척을 하자 놀랍게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생각보다는 분위기가 괜찮아서 좋은 예감도 들었다.

서로 예전과 똑같아 보인다는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고나서 우리는 멀리가지 않고 근처에서 소박하게 소주와 안주를 시켜서먹었고, 나는 대학 다닐 때 이야기를 하며 좀 더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녀석은 대충 맞장구만 칠 뿐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이, 역시나 내 생각대로 그 당시의 우리 무리를 친구라 생각하지도 않은 듯 거의 기억하고 있는게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씁쓸하긴 했다. 허나 아쉬운건 나인걸 무슨 불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다 문득 그녀석이 나에게 의외의 말을 던져왔다. 자신이 진행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잘 되어가다가 갑자기 문제가 좀 생겼다면서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에서 납품한 부품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일 듯 한데, 회사로 정식 AS 요청하면 Team 이 나가서 처리해주니 금방 해결될 거란 말을 하진 않았다.

당연히.

 내가 AS 나갔던 부품 문제가 정식으로 클레임이 들어오지 않고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게 된 건 천만 다행인 상황인 것을.

게다가 어쩌면 이건 나에게 마지막 기회가 찾아온 것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나는 당연히 도와야 하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자신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단 사실을 공식적으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고 그래도 나와는 아는 사이였기에 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한 거라고,

난 그의 요청을, 착각했다.

 그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녀석의 집으로 가야했다.

집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라니 재벌 아들의 소꿉장난 같겠지만 난 이미 일전에 그 규모를 언뜻 본 적이 있기에 그게 장난같은 건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장난인듯 장난아닌 이런 짓을 하는 인간이라니, 그녀석은 정말 이상한 인간이었다.

당연히 보통의 학생들과는 달랐겠지만, 재벌이라는 특수성에 과하게 가려져서 그녀석의 성격이 잘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그 덮개를 들어내더라도 그녀석은 엄청나게 독특한 인간이었다.

처음에 그녀석과 친해지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가려 했을때 그녀석의 결벽증은 나를 너무 힘들게 했었다.

만날때마다 옷에 잡티하나 없도록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라도 그녀석은 자신이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가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오는 걸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석과는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난 그녀석의 몸에 (말 그대로) 손을 대본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고 엄청나게 똑똑하기도 했다. 엄청나게.

전공 과목에는 아주 관심이 많았고, 수업 출석도 열심히 했지만, 평가라는 항목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물론 학교는 그녀석을 감히 제적시키지는 못했고.

 전공과목 수업 중 “분자단위 입자의 구성론” 수업에서 교수와 맞붙어 학기 내내 교수와 같이 강단에 서다가 결국 자신이 이론이 가능하다는 인정을 받았다던지,

 실험 계획을 지도교수에게 제출했다가 ‘이런 황당한 짓을 공학자가 왜 하냐’는 지적을 받고 수업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고-스스로 아주 흥미로워했던 과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몇주동안 집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다는 둥 어떻게 보면 궁극적인 NERD의 상징같은 존재였다.

거기다 본인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게 분명한 그 재산까지.


 그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금 바로 같이 갈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어색했다. 상당히.

예전 내 기억대로였다면 내 입에서 언제쯤 가면 되겠냐는 말이 나오게 하거나, 내가 그 말을 하지 않는다면 바로 내쳐버렸을 인간인데.

아무튼 내가 거절해서는 안되는 부탁 또는 지시였을테니 난 냉큼 따라나섰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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